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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게벳의 노래가 불편한 이유

이 글을 쓰고 나면 아마 불편한 반응들이 많을 것이다. 한참 사람들이 은혜받는 컨텐츠에 이렇게 딴지를 거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다. 예전에 블로그에 야베스의 기도 관련된 글을 썼을 때도 달리는 댓글들이 참...-_-;;

일단 먼저 전제하는 것은 나는 요게벳의 노래가 이야기하려는 중심적인 메시지에는 불만이 없다. 아이에게 너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해주는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이 노래가 불편하다고 하는 것은 이 노래를 비롯해 이집트 왕자와 기타 여러가지 컨텐츠들이 모세의 갈대상자 스토리를 사용하는 해석 방식에 대한 불편함이다. 

아이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며 무너지는 마음으로 아이를 강에 띄워보내는 그 어머니의 마음... 하지만 사실 이 행위를 있는 그대로 오늘날 재현한다면 아이를 강에 유기하는 끔직한 영아유기범죄의 현장이 된다. 아무리 아이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아이를 강에 띄워보내는 부모라니... 이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감동받는 것이 정상적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버리는 부모의 마음처럼, 어떤 결단도 쉬운 결단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절절하다고 해서 그 행동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아이를 버리는 행위를 하나님께 아이를 맡기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문제는 모세에 대한 이런 스토리가 성경에 나와있는 언급과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 나타나는 모세의 이야기 속에서 모세의 부모는 이런 끔찍한 영아유기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버리지 않았다. 해당 사건의 본문인 출애굽기 2장을 보면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묘사한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 2:3)

이 본문 속에서 그 부모는 아기를 담은 갈대상자를 나일강에 흘려보내지 않았다. 성경에는 분명히 나일 강 가에 있는 갈대 사이에 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두었다. 두었다! 두었다!!!!!!!!!!  흘려보내지 않고 거기에 두었다. 그것도 갈대 사이에 두었다. 나일강의 갈대가 어떠냐고? 아래 사진을 보자.

012
나일강의 파피루스 갈대

빽빽하다. 나일강 주변의 갈대는 빽빽하게 자라는 억센 갈대다. 길이는 4~5m 높이까지 자란다. 파피루스 만들 때 쓰는 갈대가 이 갈대이다. 모세의 갈대상자를 만든 것도 이 갈대이고 당시에 배를 만드는 재료로도 쓰였다. 그만큼 단단하다. 이런 갈대 사이에 아이를 담은 상자를 두는 것이 과연 떠내려 보낼 생각으로 놓는 것일까? 갈대상자에 역청과 송진을 칠해서 이런 갈대 사이에 두었다는 것은 이것을 흘려보낼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발견되도록 물이 새지않고 최대한 오래 떠 있게 하려는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세의 부모는 나일강가 갈대 사이에 아기를 버린 것이 아니다.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출 2:4)

갈대 사이에 놓아둔 아기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누이가 보고 있다. 모세의 가족은 아기를 강가에 놓아두고 돌아서지 않았다. 이 아이는 절대 혼자 버려졌던 것이 아니다. 가족은 이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다. 게다가 이어지는 이야기는 애초에 이 부모의 계획이 자신이 키우지 못하는 아기를 대신 키워줄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갈대 상자를 감시하던 미리암은 바로의 공주가 갈대상자를 발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세의 친모를 유모로 공주에게 소개한다. 이 일로 인해 모세는 결국 목숨도 보전하면서 친모의 보호 아래 자랄 수 있었다. 모세의 부모는 아기의 목숨을 걱정해야 했고 그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기를 강물에 띄워보내는 무책임한 짓을 하지 않았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가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 기회를 찾았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을 때 지혜를 발휘해 결국 마지막까지 아기를 자신의 보호아래 키울 수 있었다. 모세의 부모는 아기를 떠내려 보내지 않고 마지막까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아기를 키웠다.

물론 그 아기는 공주의 아이로 자랐기 때문에 아마 모세의 어머니는 크면서 이 아이에게 '엄마' 소리 한번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솔로몬의 현명한 재판 이야기에 나오는 두 어머니가 생각난다. 아이를 반으로 자르라는 솔로몬 왕의 판결에 엄마이길 포기하면서까지 아기가 사는 길을 도모했던 엄마와 왕의 판단을 현명한 판단이라며 아이를 떠맡겨 버리는 엄마, 과연 내 아이라면 나는 하나님께 맡긴다며 아이를 강물에 띄워보낼텐가? 아니면 평생 부모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그 아기가 살 길을 찾으려 애쓸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긴다는 말을 할 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기는 자세는 과연 아이를 강물에 떠내려보내듯 우리 삶과 우리 자녀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인가? 아니면 손해와 치욕 그리고 인정받지 못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붙들고 애쓰는 것인가? 어떤 부분에서 은혜를 받고 감동을 느끼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말하는 스토리가 얼마나 성경의 이야기와 거리가 있으며, 오늘날 현실에서 재현될 때 얼마나 비정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글을 쓰고 나서 어쩌다보니 원작자인 염평안님에게까지 글이 흘러갔다. ㅎㅎ 그럴만한 글인가 모르겠네. 같이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서 염평안님의 페북에 올라온 이 내용 관련된 송스토리를 링크로 남긴다. 하지만 나는 흔히 팩션드라마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상상과 왜곡의 경계는 원작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에 살을 붙이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요게벳의 노래나 이집트 왕자에서 사용하는 '흘려보낸다'는 이미지는 단순히 추론과 상상만으로 말하기에는 불편함이 있다.

그리고 사실 이 글은 원작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 그런 표현으로 부모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정서적으로 불편하다고 쓴 글이다. 나는 모세의 가족이 슬프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아기를 강에 흘려보내는 것보다는 조금 더 책임감 있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아기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과 우리의 올바른 신앙적 자세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https://www.facebook.com/yumpyungahn/posts/1957082227667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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