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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가 쓰는 복음 이야기(1:1~4)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쓰여진 글입니다. 데오빌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료는 없습니다. 혹자는 가상의 인물이라고도 말하지요. 일단 누가의 말들을 통해서 우리가 데오빌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각하'라고 불려질만큼 꽤 고위층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누가복음은 부자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누가복음은 부유한 자들에게 쓰는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글을 데오빌로가 알고 있는 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 썼다고 말합니다. 아마 데오빌로는 그 전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접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복음서라는 신화(이야기)를 통해 그가 접한 것이 단순히 이론이 아닌 그의 가치와 세계를 형성하게 도와주려 하고 있습니다.

요즘 읽고 있는 크로산의 <어두운 간격>이라는 책에서 크로산은 신화와 비유를 비교하면서 신화는 세계 가운데 있는 모순들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하는 반면 비유는 형성된 세계를 전복시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신화는 세계를 설립하는 기능을 하지만 비유는 설립된 세계를 상대화 시키고 헤체시켜 신화가 가지고 있는 모순들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비유가 인간이 신을 만나는 '세계의 경계'를 경험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신화의 형태를 띤 하나의 큰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현실의 가치를 전복시키고 상대화 시키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당연히 주어져야 할 자에게 주어지리라 예상했던 것들이 주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닌 이방인이었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그런 은혜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비유는 하나님이 당연히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서 떠나 함께 있어선 안된다고 여겨졌던 자들과 함께 하셨던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야기합니다.

누가는 비유를 전합니다. 그것이 데오빌로의 인생을 바꾼 것이고 그가 만난 하나님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만들어 내는 말과 글은 다른 누군가를 향해 하나님의 흔적을 경험하게 하는가? 썩어빠진 가짜 신화로 가득한 세상에 진정한 비유꾼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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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가 쓰는 복음 이야기(1:1~4)  (0) 2020.01.23
   

소돔에 대한 오해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흔히 동성애를 경계하는 성서 본문으로 자주 인용되곤 한다. 소돔과 고모라가 성적으로 타락하였고 그 안에 동성연애가 만연했던 것이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은 이유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본문을 이렇게 읽는 것은 많은 오해에 근거한다.

먼저 소돔성과 동성연애를 연결시키는 많은 많은 근거 중에 하나가 바로 소돔이라는 이름 자체가 동성연애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동성연애를 뜻하는 영어 sodomy는 성경의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이것을 근거로 소돔과 동성연애를 연결시키는 것은 앞뒤가 바뀐 해석이다.

왜냐하면 동성연애를 의미하는 sodomy는 소돔을 동성연애와 연결시키는 성경해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소돔 도시 이름이 동성연애와 연결된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성경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경해석이 있었고 그 해석에 근거해서 새로운 현상에 관한 단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정작 '소돔'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불태우다'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되었다.

소돔성과 동성연애를 연결시키는 두번째 근거는 소돔사람들이 방문한 천사들을 내어달라며 롯에게 했던 말에서 나타난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여기서 '상관하다'라고 번역된 문장의 원어가 히브리어 '야다'인데 이것이 부부간에 은밀한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돔사람들이 그들과 '야다'하겠다는 말은 그들을 성적으로 겁탈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행위는 동성연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문맥을 벗어난 구시대적 원어 해석방식일 뿐이다. 문맥을 무시하고 어원을 추적해서 단어의 의미를 풀어내는 해석방식은 설교를 하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본래 문장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에 현대 언어학에서는 주의를 요하거나 거부되고 있는 해석방식이다. 

'야다'의 기본적인 의미는 '알다'이다. 즉, '야다'가 그런 친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경우에도 사용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자주 사용되는 번역어는 일반적인 의미의 '알다'라는 뜻이다. 언젠가 한 이단 단체의 대표가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을 해석하면서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문장을 우리말 은어인 남자가 여자를 성적으로 범하는 행위와 연결시켜서 해석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남자가 여자랑 잠자리를 가질 때 '따먹는다'고 하지 않는냐,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의미다"라고 했다. 물론 '따먹다'는 단어가 그런 의미로 사용되어질 수 있지만 은어로 사용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일반적인 문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되어야 하는 의미는 '높이 있는 무언가를 채취해서 섭취한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모든 '따먹다'라는 단어를 성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 사람은 사회생활은 가능하냐?

창세기에서 소돔 사람들이 말하는 문장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겠다'라는 뜻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안에 성적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 이 문장만으로 그들이 동성연애자라고 말하는 것은 문장 자체를 오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돔사람들을 대하는 롯의 대처는 그들이 동성연애자라는 전제를 거부한다. 롯의 집에 찾아온 천사들을 요청하는 소돔사람들 앞에 롯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창 19:8)

롯은 지금 자신의 두 딸을 희생하면서까지 천사들을 지키기 위한 딜을 하려고 한다. 딜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받아들일만한 제안을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소돔사람들이 동성애자였으면, 그리고 그들이 동성연애를 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왜 롯은 자신의 두 딸을 대신 내어주겠다고 했겠는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여자를 범하려는 강간범에게 그러지 말라면서 대신 내 아들을 주겠다고 한다면 그 강간범은 여자를 포기하고 아들을 받을까? 여성을 탐하는 이에게 대신 남성을 주는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남성을 탐하는 동성연애자에게 여성을 댓가로 내미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롯은 이 거래가 먹힐 것이라 기대하고 또 그러길 바라고 있다. 이는 롯이 소돔사람들을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돔땅은 왜 멸망했는가? 성경의 대답은 간단하다. 동성애가 아니라 의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붙들고 말했듯이 의인 10명이 없었기에 소돔은 하나님의 분노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죄악에 대한 대답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선지자에 의해서 지적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의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겔 16:48~50)

창세기에 나타나는 소돔 이야기는 그 어떤 부분도 동성애와 연결되지 않다. 성경의 저자나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도 동성애를 전제하거나 기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동성애가 옳다 그르다 각자의 해석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근거인 성경의 해석에 대해서는 항상 신중해야 할 것이다. 진리의 집은 모래 위에 지을 수 없다.

   

20191204 적응 중

새로운 교회에 와서 지난 주일 처음 인사를 드리고 열심히 적응하고 있다. 담임목사님이 한달정도 보면서 분위기를 익히라고 하셔서 강제적인(?) 휴가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지금 교회에 지원하면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요즘은 보기 힘든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도시의 교회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요소들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는 교회다. 대표적인 예로 아직도 주일 밤예배를 드린다. ㅎ 그것도 꽤 많은 성도들이 밤예배에 참여한다. 주일 밤 예배가 끝나고 교회 주차장에서 차들이 빠져나가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다.

그러면 전형적인 시골교회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젊은 층도 꽤 많다. 전체적인 규모가 지난번 오산교회보다 조금 작은데, 청년들이나 교육부의 규모는 지난번 오산과 비슷한 반면 노년층의 비율은 오히려 오산 교회보다 적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전형적인 시골교회의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한참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는 오산에 비해서 오히려 젊고 활기찬 분위기다. 물론 말못한 사정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교회를 기대하게 하는 것은 그런 부분이라고 하겠다.

전에도 글로 한번 썼지만 이번 교회가 마지막 부교역자 사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꼭 의미있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사역이 되길 기대해본다.

   

20191125 빅콰이어 가스펠 클라스 마무리

교회 사역을 하면서 노래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교회에서 찬양인도도 하고 있고, 찬양할 일이 있으면 늘 도맡아 할만큼 노래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내 목소리를 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하고 있는, 자유하기보다는 익숙한 틀을 답습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단순히 목소리의 문제이기보다는 마음가짐의 문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전환점이 필요했고, 조금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 빅콰이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겨우 3개월만에 드라마틱하게 실력이 늘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여러 강사님들의 전문적인 코칭을 받으면서 무언가 나를 되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가지고 있었던 예배자로서의 마음, 찬양에 대한 열정들에 불을 되살려 주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종강콘서트를 준비하면서 1:1로 트레이닝을 받았던 시간은 지금껏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지점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시는 세심함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것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빅콰이어에 있으면서 참여했던 사역들도 참 좋았습니다. 교회에 묶여 있는 신분이다보니 많은 사역에 동참하진 못했지만, 참여했던 사역들에서 은혜를 끼치기 이전에 많은 은혜를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노래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그래서 정규클라스도 끝까지 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래도 가스펠 클래스를 잘 마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1월이 저에게는 여러가지 변환점이 겹쳐있는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는데, 빅콰이어 덕분에 한 텀을 잘 마무리한 것 같습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 1시간 반 차를 몰고 가면서 차 안에서 사역곡과 종강 콘서트 곡들을 불러보던 시간이 참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다음 분기에는 가스펠 클라스가 없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혹시 찬양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꼭 참여해보시길 권해봅니다.^^

 

 

   

20191124 임마누엘교회 사역 마무리

2년반 정도의 짧은 사역을 마무리 했습니다. 사역을 하면 할수록 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지만, 이번 사역지에서는 특히나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사랑으로 걱정해주시고 기도해주시고 섬겨주신 성도님들 덕분에 사역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늘 과분한 섬김을 받고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죄송하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그 섬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역자가 되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 한번 감사하고 임마누엘교회를 위해서 늘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새롭게 가는 사역지에서도 언제나 그랬듯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주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며 나아갑니다. 아마 기존교회 사역은 이번에 가는 교회가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사역을 위해 잘 준비되어지는 부교역자 사역이 될 수 있도록 많이 배우고 훈련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

 

우리 구원의 과정은 종종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이미지는 복음서에 나오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예수의 비유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하나님은 우리를 왜 잃어버리셨나?" 물론 이런 물음에는 정해진 답이 있다. 바로 인간의 죄의 문제... 아담과 하와, 원죄, 이스라엘의 배신 등... 우리가 하나님을 싫어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해답이 우리 삶의 환경에 적절하게 들어맞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세때처럼 내가 원치 않게 기독교인으로 태어났다가 그를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떠나온 경험보다는 잃어버림 속에서 태어나서 내가 원치 않게 떠나옴 당하기 때문이다.

놀이공원에 놀러간 어머니가 사람들 속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 이 아이를 다시 찾았을 때 어머니는 아이를 꾸짖을 것이다. "엄마가 손 꼭 잡고 있으랬잖아!! 어디 갔었어?!" 그런데 만약 그 잃어버린 아이를 20년만에 찾았다고 해보자 어른이 된 아이는 부모를 만나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왜 날 잃어버리셨나요?" 잃어버림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는가? 아니면 자식에게 있는가? 사실 놀이공원에서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고 나서 꾸짖는 부모의 마음 역시 아이의 잘못을 꾸짖기 위함이기보다는 아이를 찾았다는 안도감과 아이를 챙기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하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해서 자주 말한다. 그러다보니 거기에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서 탕자를 죄인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를 방탕한 아들로 만든 아버지는 깨끗한가? 왜 우리는 잃어버린 이들을 향해 "하나님이 널 잃어버려서 미안하다고 하셔" "하나님이 널 지키지 못한 그날을 죽음처럼 후회하고 계셔" "하나님이 온 인생을 바쳐 지금껏 너를 찾고 계셨어" "미안해, 잘못했어"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실 다른 이의 채무를 대신 갚는 유대 제사적 대속의 개념이나 노예를 돈주고 사는 헬라적 의미가 아니라 잃어버린 아이를 자기 목숨까지 내어서라도 찾고 싶었던 성부수난적 죽음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잃어버린 하나님은 왜 항상 당당한가? 우리가 떠났다고 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사실 잃어버린 아이를 맘에 없는 말로 꾸짖는 엄마의 말과 같은 것은 아닐까? 그가 죄에 대해서 말할 때 사실 그것은 자기를 향한 채찍이 아닐까? 십자가로 걸어가는 길에 맞았던 그 채찍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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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배를 드리다가 오랫만에 참 감사하게도 불경한(?) 묵상을 하게 되어 글을 옮겨본다. 물론 이런 생각이 과거에 이단으로 정죄받았던 양태론이라는 맥락속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미리 말해놓는다. 하지만 몰트만 이후에 십자가의 수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런 읽기도 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날씨의 아이] 리뷰



시국이 시국임에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을 영화관에서 보지 않으면 나중에 작은 컴퓨터 화면 앞에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보고 왔다.

분명히 말하지만 스포일러 있으니 날 원망하지 마시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분명 이 작품을 한번 더 볼 것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작품이다. 어떤 이들은 개연성이나 이야기 흐름 등에 대해서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그런 거 느껴질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다. 나름 '맑음'의 가치를 뒤집는 영화의 메시지도 너무 좋았다. 무엇보다 이번에도 작화가 미쳤다. 두 주인공이 스카이 다이빙 하는 부분에선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진짜 ㅈㄴ 멋있다.

어떤 유투버는 이 영화가 일본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석하던데 나름 괜찮은 분석이라고 본다. 특히나 나는 맑음이 돌아온 세상 속에서도 누구도 여주인공의 희생을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행복이 얼마나 많은 무명의 '맑음 소녀'들의 희생 위에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과거의 희생제사의 문제를 가져온 시대 착오적 작품이라는 누군가의 해석은 오히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너무 안일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싶다.

전작인 주인공들이 다시 등장하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특성은 이번 작품에도 유효했다. 중간에 등장하는 타키와 미츠하가 얼마나 반갑던지, 그리고 누군가의 말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다카오와 유키노 선생님은 신주쿠 공원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이번에도 RADWIMPS의 노래는 영화와 잘 맞아 떨어졌다.

   

20191031 빅콰이어 사역 참여

빅콰이어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외부 사역에 동참했다.
평소의 사역곡이 아니라 기존곡들로 이뤄진 찬양예배였지만 그래도 함께 설 수 있어서 감사한 자리.
이렇게 함께 뛰며 찬양한 경험이 언제였더라^^
11월 사역도 기대함으로~

요즘 노래배운다는 핑계로 어울리지 않게 너무 홀리하게 살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공부도 좀 해야하는데,
평일 저녁이랑 월요일까지 시간을 할애하니 어쩔 수 없이 좋은 강의나 모임들도 여럿 포기하고 있다.
일단 작정한 시간들은 잘 마무리하고 12월에 사역지를 옮기면서부터는 조절을 좀 해야겠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11월말이 뭔가 커다란 분기점처럼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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