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팔로 다이어리

20191017 만들기 대행진

내 외부 현수막
선포식 분과 피켓

40일 전도대행진을 앞두고 이런 저런 정리할 것들과 준비할 것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얼마 전 같았으면 업체에 맡겼을 디자인 작업을 요즘들어 자꾸 내게 하게 된다. 뭐 여러가지 조합해서 만드는 거야, 어설픈 템플릿 쓰는 것보다 나을 수 있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는 소스가 빈약하다보니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가 쉽지가 않다.

그나마 디자이너가 작업해놓은 몇몇 소스 파일들이 있기에 망정이지... 덕분에 요즘 포토샵을 줄기차게 돌려대고 있다. ㅎㅎㅎ 이렇게 만든 홍보물이 좋은 결과를 내는데 효과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영상도 그렇지만 한번 쓰면 버려지는 성향이 강해서 준비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서 허무한 느낌이 강한데, 뭔가 결과라도 좋아야 보람이 있을 듯

 

   

20191016 셋째 조카 탄생

012

"아빠 오셨네요", "아니요 오빠예요"

산부인과에 갔더니 다들 나를 애 아빠인줄 알고 반겨준다. 동생이 셋째를 출산하는 날, 예정보다 좀 이른 날짜인데 진통이 시작했다길래 교회에 양해를 구하고 병원으로 왔다.

아들 둘 낳고 나서 딸을 낳길 바랬는데, 감사하게도 딸이다. 근데 누굴 닮았는지 3.7킬로의 우량아가 태어났다. 애 아빠쪽을 닮았을라나? 그래도 엄마 고생 많이 안시키고 나오는 것은 지 오빠들을 닮았다.

애기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남자 조카와 여자 조카는 느낌이 다를라나?" 뭔가 보고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ㅎ

   

20191014 수기르타라자, 테드 제닝스 강연

경동교회 처음 가봄
이름값하는 사람들
요즘 왠만한 교회에는 다 있는 프로젝트 스크린이나 LED 화면이 없다.
사실 자료집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수기르타자라와 테드 제닝스가 앉아서 안병무 얘기하는 강연 ㅋ

마태복음 족보에 나오는 여성들은 대부분 창녀, 간음한 여인 같은 당시 죄인이라고 여겨지던 사람들이다.
예전엔 이처럼 여성이 족보에 등장하는 것이 여성의 지위를 높이 평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라의 구조를 따르는 마태복음의 특성상 예수 족보에 나타난 여인들은 예수를 욕되게 하고 더럽히는 존재들로 여겨졌을 것이다.
마태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렇게 더럽혀진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고 인간으로, 겸손하게 오셨다고 말한다.
낮고낮은 자리로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은 불경스럽게 여기지 않는 우리가 창녀, 불륜녀의 자손으로 오셨다고 말하는 것은 불경스럽게 여기는 것일까?
왜 예수가 사생아로 오셨다고 하면 우리에게 걸림이 되는가? 단지 성경과 다르기 때문인가?
왜 그런 말은 예수의 겸손이 아니라 불경이나 신성모독으로 여겨지는가?
나와 창녀, 미혼모와의 간극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간극보다 크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태의 족보는 역사적 예수가 어떠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마태의 고백이다. 
이것이 예수의 문제가 아니라 마태의 문제이듯이
그를 더 낮은 모습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예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일 것이다. 

왜 나의 예수는 더 낮아지지 못하는가?

   

실패한 설교에 대한 반성문

설교를 하다보면 중간에 당혹스러워지는 경우들이 있다.

본문의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쓰기 시작했는데, 묵상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결론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쓰게 되는 경우 쓰다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잡해진다. 본문 분석은 잘 되어 있는데, 결론이 나오질 않는다. 본문이 가진 아이디어를 잘못 프레이밍 한 경우들이 보통 그렇다. 이럴 경우 프레임을 바꿔주면 쉽게 풀리긴 하는데, 이미 써 놓은 단락 단위의 글들의 앞뒤를 바꿔주면서 해결이 가능하다. 이걸 쫌 일찍 깨달으면 다행인데, 열심히 쓰고 나서 결론쯤 쓰려고 할 때 결론이 왜 안써지지 생각이 들면 이런 경우다. 종종 결론을 비우고 설교단에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설교는 100% 망한다.

반대의 경우는 본문에서 어떤 은혜를 받아서 쓰기 시작했는데, 본문 분석이 제대로 안되어 있어서 쓰다보니 사실 본문이 말하려는 것이 그것이 아닌 것 같은 경우가 있다. 이럴 땐 답이 없다. 그냥 다 갈아 엎어야 한다. 이럴 때 사람마다 해결방법이 다른데, 어찌어찌 말을 돌려서 쓰시는 경우들이 있는가 하면, 본문과는 상관없이 설교를 하는 경우도 있다. 나같은 경우는 그냥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빠르고 마음이 편하다.

사실 두가지 경우라고 하지만 둘 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지 않아서 생긴 문제들이다. 같은 문제의 다른 양상일 뿐이다.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타입이라 이런 경우들이 종종 있다. 미리 본문분석 잘 해서 개요까지 잘 잡혀있는 상태에서 글을 쓴다면 지금보다 나아질까? 언제나 고민하지만 그래봤자 문제는 나의 나태함이라는 것이 결론이다.

아버지 오늘도 부족한 설교를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Speechless - Steven Curtis Chapman(1999)

오늘 하루 종일 스티븐 커티스 채프먼 노래에 꽂혀서 여기저기 찾아듣느라 일을 못하고 있다. 찾아 듣는 김에 글 하나 쓰기로 했다.

이 노래는 1999년에 발매된 [Speechless] 앨범에 실린 곡이다. 우리나라에는 컨티넨탈싱어즈가 부른 '표현못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2000년 초반쯤에 교회에서 학생회나 청년회에서 발표회 같은 거 한다고 하면 한번쯤 고려되던 곡이다. 빠른 탬포와 함께 특유의 스트링 섞인 강력한 기타사운드 때문에 춤추는 포인트 주기 좋았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 CCD 영상이라면서 돌아다녔는데 이번에 찾을래니 없어진 듯 하다. 하긴 저작권 문제됐을 듯. 요즘은 슈스케 출신 홍대광이 부르고 다니는 것 같다. 컨티넨탈 버전보다 원곡에 가깝다.

그런데 당시 앨범타이틀은 [Speechless]였지만 정작 1번트랙이었던 Dive에 밀려 1번이 아닌 2번트랙에 실려 있었다. 심지어 Dive는 뮤직비디오도 있지만 Speechless는 없다. 뭐 그만큼 Dive도 좋은 곡이니 한번 들어보길 추천한다. 

Speechless는 우리나라에서 컨티넨탈싱어즈 8집에 번역되어 실린 덕분에 가사를 이해하면서 듣기에도 많은 어려움이 없다. 후렴부 번역은 꽤 잘됐다. 앞부분 번역은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긴 했지만... 채프만의 노래들은 가사가 좋은 곡들이 많다. 구조는 단순하지만 직접적이고 잘 다듬어져 있다. 게다가 워낙에 기타연주가 훌륭하기 때문에 기타연주 듣는 재미로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My words fall like drops of rain
My lips are like clouds
I've said so many things, trying to figure you out
As mercy opens my eyes, my words are stolen away
With this breathtaking view of your grace...

And I am speechless
I'm astonished and amazed
I am silenced by your wondrous grace
You have saved me
You have raised me from the grave
And I am Speechless
In your presence now
I'm astounded as I consider how
You have shown us the love that leaves us speechless

So what kind of love can this be
That will trade heaven's throne for a cross
To think that you still celebrate
For finding just one who was lost
To know you rejoice over us
The God of this whole universe
It's a story too great for words...

And I am speechless
I'm astonished and amazed
I am silenced by your wondrous grace
You have saved me
You have raised me from the grave
And I am Speechless
In your presence now
I'm astounded as I consider how
You have shown us the love that leaves us speechless

'제이팔로의 추억의 해외CCM' 카테고리의 다른 글

Speechless - Steven Curtis Chapman(1999)  (0) 2019.10.11
   

20191009 수요예배 설교

티키틱 영상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상을 중심으로 설교를 구성해보고 싶었습니다.
본래 말하려고 했던 내용과 핀트가 다르게 흘러간 것 같기도 하고...
설교를 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너무 순종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 같아 아쉽기도 합니다.
결론부는 요즘 교회에서 전도대행진을 진행 중이라 관련된 내용으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꼭 전도와 관련된 내용을 쓰기 위해서 쓴 설교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설교중에 보여드린 영상의 원본은 아래 링크합니다.
[티키틱] 제가 왜 늦었냐면요

   

2019.10.3 새로운 사역지 찾기

오랫만에 이력서를 쓰고 있다. 이 교회에 오고 이제 2년 반이 다 되어 간다. 처음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오니 이제 슬슬 다음 사역지를 찾아야지. 

왜 이 교회에 더 있지 않냐고? 사실 이 교회 오기 전에 연세대학교회에 있으면서 나의 포지션이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청년부 하나에 사역자 둘을 붙여놓은 상황이었지. 담당 사역자는 따로 있는데 옆에 꼽사리 붙어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사역지를 옮길 때 애매한 자리를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더랬다. 그런데 이 교회에 와서도 결국 애매한 위치에 있게 되어 버렸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처음 맡기로 했던 사역을 '나중에'라는 말에 넘어갔던 부분이 컸던 것 같다. 이전에 사무간사가 하던 일을 함께 맡고 있어서 사역 반경이 어정쩡한 상황에서 맡기로 했던 부서가 날아가는 상황이 되니, 그 때부터는 그냥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어 버린 뭐 그런 상황이다. 

이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 사람 분의 사례비를 받으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어설프게 맡은 다른 부서는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옷들이었고, 뭔가 빵꾸난 데 돌려쓰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앞으로 이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고, 옮기는 것이 답이겠다 싶었다.

오랫만에 이력서를 쓰려니 쉽지가 않다. 내 장점이 뭐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난 무슨 생각으로 사역을 했었나? 난 왜 이 교단에 와서 목사안수를 받았을까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되고 있다. 다음 사역지는 가능하면 서울쪽으로 알아보려고 하는데, 안산에 있는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_-;; 담임목사 하려면 지방 사역 2년 경력도 쌓아야 하는데, 과연 나는 서울 컴백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야베스처럼 기도하지 말라 : 다시 읽는 야베스의 기도

요게벳의 노래 관련된 글을 쓰다가 생각난 김에 전에 블로그에 있던 야베스의 기도 관련 글을 가져왔다. 2009년에 쓴 글이어서 오타 몇가지 고치고 추가적인 내용은 뒤에 붙여본다.


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문득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든 생각을 남겨본다.

지금까지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따라야할 기도의 모본은 예수님의 기도이지 성경에 짧게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가 아니다라고만 할 뿐 정작 야베스의 기도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을 해준 책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야베스의 기도가 존귀한 자의 기도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윌킨스의 책을 비판해보려 한다.

일단 야베스는 그의 기도로 인해 존귀해진 것이 아니다. 성경엔 야베스가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미 존귀한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 그의 기도가 그를 존귀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존귀한 자라는 표현은 '그 형제보다'라는 제한을 가지고 있다. 그냥 존귀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들 사이에서 더 존귀한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존귀함이라는 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어떤 것인지 의문을 갖게한다.

무엇보다 '존귀한'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존경할만한'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고, 뛰어난 장수를 표현할 때 쓰는 '뛰어난'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공동번역은 이 말을 '가장 세력있는'이라고 번역하였다. 브렌튼은 70인역 영어 번역에서 이 단어를 famous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존귀한'의 의미보다는 더 크고 세력이 있고 기능적으로 뛰어난 혹은 여러사람에게 잘 알려져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가족중에서 그가 존경받거나 뛰어나게 여겨질 이유라면 당시 사회의 문화적인 것을 고려할 때 공동번역의 해석이 힘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공동번역의 번역을 따라가자면 일은 점점 심각해진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기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는 더 구하는가? 여기서 '하나님을 위해'라는 말을 붙여 해석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곡해이다. 본문 어디에서 그런 것은 드러나 있지 않다.

구약의 사회에서 지경을 넓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여기서 지경이라는 말은 '경계'라는 말이다. 히브리어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으면 가장 먼저 나오는 용례는 신명기 19 14절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여기서 옮기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경계표'가 야베스가 넓혀달라는 '지경'과 같은 단어이다. 다른 용례에서도 경계는 가나안 입성과 함께 하나님이 정해주신 각 기업의 경계를 의미한다. 일부 예외적인 구절을 제외하고 이 단어는 다른 용례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고 사람이 옮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야베스는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를 위해서 주의 명령을 어기길 요구한다는 말인가? 성경에 따르면 당시에는 토지의 매매자체가 불가능했다. 돈이 필요할 경우 땅을 빌려줄 수 있었을 뿐이다. 다시 되찾고 싶으면 언제든지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하여 값을 지불하고 다시 그 땅을 찾아올 수 있었고 돈이 없으면 가까운 친척이 그 땅을 되찾아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희년이 되면 그 땅은 아무 댓가 없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다. 당시에 경계를 옮길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었다. 율법을 어기고 자기보다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

그 당시에 농경사회를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땅을 곧 생존을 의미했다. 더군다나 역대기의 기록연대(야베스의 생존 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를 포로기 귀환 이후로 볼 때 그 당시에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기업을 되찾으려하는 유대인들에게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넓히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기업을 그대로 되찾는 것이 그들에겐 약속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베스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불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비전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내 형제가 죽어도 상관없으니 내꺼 크게 해달라는 기도를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땅과 관련된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 나온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 당시 포도원을 팔 것을 요구했던 아합왕의 요구에 물려받은 기업이라 팔 수 없다는 나봇을 이세벨이 죽인다. 시돈의 딸인 이세벨과 아합이 결혼하면서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기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물신숭배 사상이 이스라엘을 뒤덮으면서 이스라엘의 전통적 토지체제는 붕괴하게 된다. 이처럼 성경에서 우상의 숭배는 단순히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넘어서 그 사회체제 자체를 뒤바뀌는 것이다. 여호와가 버림받고 바알이 이스라엘을 지배한다.

물론 야베스의 시대를 확정할 수는 없다. 역대기의 족보가 워낙 광범위한데다가 야베스의 이야기는 족보와 거의 독립되어서 쓰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뻔뻔한 외침이 가능했던 시기라면 그 때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도 악인이 승리하는 것 같은 그 시대에도 역사를 끌어가시는 것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렇다. 브루스 윌킨스의 말이 다 맞다 치자. 그래도 이 책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 다름 아닌 역대상 4:9~10절의 주인공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기도를 들으신 것은 하나님이다. 야베스의 기도가 뛰어난 기도여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다. 여기다 중요 표시 몇개를 해야 이 중요성이 표현될 수 있을까? 그 기도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 기도가 뛰어나서 하나님이 들으신 것이 아니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요, 결정이다.

도대체 그렇게 이기적이고 불법적인 기도를 하나님이 왜 들으셨는지는 그냥 모르는 것으로 남겨둬야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히 기도를 들어주셔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와 그의 기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부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부자가 되었고 가난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십일조 많이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NO! 그 사람을 부자 만드는 것은 그가 십일조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쓰임 받겠다고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릴 쓰시기 위해 다른 일들을 하신다. 앞뒤 순서가 잘못되도 너무 잘못됐다. 해석이야 각자 다를 수 있다치더라도 기도의 주체가 누구인지만은 분명히 해야하지 않을까?


여기서부터 추가분

2009년에 이 글을 쓸 때는 아마도 내가 개역한글판을 썼나보다. 당시에 야베스의 기도 책자 역시 개역한글판을 썼고 관련해서 나온 노래도 개역한글판을 썼기에 당시에 야베스의 기도 본문은 아래와 같았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런데 오랫만에 글을 수정하려고 봤더니 개역개정에서는 아래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냥 복을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려거든 이런이런 복을 달라는 표현으로 읽힌다. 이 부분은 오히려 내가 위에 썼던 내용과 연결이 잘 되는 것 같다.

물론 9절에서 '존귀한 자'라는 표현을 '귀중한 자'라고 번역한 것은 뒤에 이어지는 어머니가 그를 수고롭게 나았다는 언급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번역이 아닐까 싶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동번역의 표현이 활력있게 들린다. 물론, '귀중한 자'라는 표현을 야베스가 이런 악한 기도를 드리게 된 원인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부모가 어렵게 낳아서 오냐오냐 '귀하게' 키우는 바람에 이렇게 앞뒤 모르는 기도를 드린 것일지도...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