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의 노래 – 시편 115편

얼마 전에 인터넷에 꽤 뜨거운 이슈가 된 이벤트가 있었다.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말 꽤나 하는 유시민과 홍준표가 함께 합방(?)을 한 것이다. 이 만남이 시끄러웠던 이유는 유투브라는 생태계 위에 정해진 알고리즘의 벽을 넘어서려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AI와 복잡한 알고리즘이 사용자 한사람 한사람의 필요나 취향을 맞춰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개인화가 나와 다른 목소리를 가려버리는 벽으로 작용한다는 우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특히나 유투브 같은 경우 이런 편향성이 더욱 심해서 일부러 찾아보려 하지 않는 이상, 내 취향과 다른 의견이나 주장들을 접하기는 힘들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두 진영에서 영향력 있는 두 사람이 유투브라는 포멧 위에서 만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 둘의 만남이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고, 나온 이야기들도 특별히 신선하다 할 것은 없었다. 다만, 굉장히 편향된 팬덤을 가지고 있을 서로의 채널에서 전혀 다른 의견이 들리게 했다는 점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자신이 선호하는 이의 채널에서 이 영상을 봤을 것이고, 달리는 댓글을 봐도 같은 방송을 봤음에도 홍카콜라와 알릴레오 영상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댓글들이 도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 나도 홍카콜라에 올라온 영상을 찾아봤고 조금이지만 보수 논객들의 영상이 추천리스트에 올라오고 있다는 것은 조금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시편 115편은 다윗의 시라고 전해지지만 사실 포로기 혹은 그 이후에 쓰여진 시로 여겨진다. 이 시에는 이스라엘의 집, 아론의 집,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이렇게 세가지로 구분된 대상들이 등장하고 그에 대한 약속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이 구분은 시편 118편에도 등장하고 조금 변형된 형태로 135편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꽤나 널리 알려진 구분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어떤 주석은 12절과 13절만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이스라엘의 집과 아론의 집을 통합하는 단위로 이해하지만 9~11절의 구분은 이런 이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내가 찾아본 주석들에서는 이 부분을 다룰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정체를 개종자로 추측하는 것에 집중한다. 이런 추측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언급을 근거하고 있으며 요세푸스 등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개종자를 언급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나머지 두 집단의 정체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아론의 집’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주석들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이 의외였다. 이 시에서 ‘이스라엘의 집’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론의 집’은 누구인가? 이들은 정말 단순하게 제사장들을 말하는가?

이 시편의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를 묻는 뭇나라들의 물음으로 시작하여 우상숭배의 문제로 연결된다. 여기서 이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이 시편이 포로기 혹은 포로기 이후의 시편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뭇나라들의 물음에 대한 시편 기자의 대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3절)”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한 뒤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 가운데 등장하는 표현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함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신앙이 위기에 처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둘 수 없는 존재로서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의 자리를 성전에서 하늘로 이동시킨다. 하늘의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을 넘어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고백되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시편기자는 이런 신앙고백 위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대비시키며 이방의 신들을 거부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거부가 우상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만든 자들과 의지하는 자들을 향한다는 것이다. 즉, 시편 기자는 신이 아니라 그 신을 섬기는 이들의 문제를 말하며 그들과 이스라엘 민족을 구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상숭배라는 맥락 속에서 볼 때 앞에서 언급했던 ‘아론의 집’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론이라는 인물은 모세의 형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후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자손들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러나, 우상숭배의 문제에 있어서 그는 어떠한가? 그는 이스라엘 민족 최초로 우상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요청으로 신의 형상을 만들었다. 물론 그는 그것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이 아니라 자신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해낸 신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었지만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점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볼 때 그의 행위는 배교자의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배교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우상의 문제로 심판받은 자들 가운데 들어 있지 않다. 그는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이다.

즉, 여기서 세가지로 구분된 집단은 일반적인 일반 이스라엘 백성, 배교자, 개종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첫번째 집단에 ‘일반’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그냥 구분을 위한 말일 뿐, 그들이 정상이라거나 그들이 옳바른 쪽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초대교회의 역사에서도 그러했지만 배교자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심각한 분열과 함께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을 변형시키고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포로기 당시 혹은 그 이후 이스라엘에서 배교자 혹은 배교 후 돌아온 이들은 개종한 외국인과 함께 큰 사회 문제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요청과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가 되시리라는 약속 그리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스라엘과 배교자 그리고 개종자에게 동일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14절에서 시편기자는 이들을 ‘너희’라는 명칭으로 칭하며 하나님이 ‘너희’와 ‘너희 자손’을 번창하게 하시기를 기원한다. 또한 이들은 18절에서 “우리”로 명명되며 죽은 자(17절)들과 구분되는 ‘이제부터’ 영원까지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대의 정체성으로 등장한다.

시편기자는 죽은 자들과 구분되는 새로운 정체성으로서의 ‘우리’를 내세워 어떤 것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찬양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들의 정체성은 ‘이제부터’ 나아갈 것이지 과거(죽은 자)에 매여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정의하는 조건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에 속한다. 이외의 다른 문제는 ‘죽은 자’(17절)의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찬양할 수 없으며 새로운 시대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폐기된다.

물론 오늘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견해에 따라 해석되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이 문제는 논란이 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배교자들과 개종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는 언제나 ‘진정성’의 문제가 붙었을 것이다. 배교자와 개종자의 입장에서는 말뿐인 이스라엘에게 언제나 ‘순수성’의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많이 있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이 우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말할 뿐이다.

이것은 결코 당연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도우시지만 하나님은 땅에서 인간이 해야할 책임의 분량을 남겨두셨다. 이스라엘의 집과 아론의 집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현실 앞에서 서로 마주해야 한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서로 용서할 수 없는 기억들과 용납하지 못할 조건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종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주님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다.” 이스라엘은 서로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는 많은 분열적인 이야기들을 땅에 묻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다는 한가지 조건으로 서로를 끌어 안아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남자든 여자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오순절주의든 개혁주의든 서로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들과 용서하지 못할 과거를 넘어서 그 고백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새로운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방인들의 우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삶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한다면, 일단 만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태생은 보수교단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진보교단에서 대학원을 나와서 안수를 받은 사람인지라 진보적인 신학에 동의하고 그에 더 많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보수 신학교에서 배웠던 가르침들과 보수적인 교단에서 느꼈던 사랑에 감사하고 있다. 나에게 큰 신학적 영감을 주는 인물 가운데에는 언제나 웨슬리가 있고, 보수적인 선교단인 예수전도단의 경험은 아직도 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믿감함을 놓치지 않게 하는 자극제가 되고 있다. 내 안에서 이것들은 서로 다른 상황 속의 이해일 뿐 용납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은 진보가 보수를 받아들이네 마네 할만큼 균형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 기독교는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고 진보는 소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대화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서로를 공격하고 입장을 이해시키려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 정답을 찾으려는 자리 말이다. 유시민과 홍준표의 대담을 보면서 한국 교회를 향한 가슴 아픈 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런 내 사정 때문인가부다.

공유하기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Content Protected Using Blog Protector By: PcDrome.